왕인이 걸었던 길, 영암에서 일본까지
전라남도 영암,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남도의 마을은 역사 속 한 인물을 통해 동아시아 문명사의 흐름에 깊이 각인된 땅이다. 이곳은 단순한 고향을 넘어, 지식과 문화의 씨앗이 처음으로 움튼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바로 ‘왕인박사’라는 이름을 통해 우리는 이 지역이 품고 있는 숨겨진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흔히 우리는 고대 한일 관계를 정치사로 접근하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사람과 사람이 만났던 교류의 따뜻한 기록이 존재한다.
왕인박사는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일본에 전한 것은 단지 ‘책’이 아닌, 백제의 정신과 학문, 그리고 인간에 대한 신뢰였다. 오늘날 영암에서 열리는 왕인문화제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장으로, 축제를 통해 우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나로 잇는다. 이 글에서는 왕인박사의 생애를 중심으로 고대 한일 교류의 실체와 왕인문화제가 지닌 현재적 의미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백제에서 출발한 학자, 왕인박사의 삶과 흔적
왕인박사의 이름은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등장함으로써 그의 존재가 단순한 전설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가 일본에 건너간 시점은 대략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로 추정되며, 이는 백제가 일본과 활발한 외교 관계를 이어가던 시기와 겹친다. 당시 일본은 아직 문자와 교육 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왕인의 등장은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그는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며 일본 지배층에게 학문의 기틀을 제공했고, 이는 단지 언어와 문자를 넘어 ‘사상’과 ‘질서’를 함께 전한 일이었다.
왕인의 활동은 문화 사절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일본 고대 귀족 사회에 유교적 덕목이 뿌리내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 것은 단순히 책을 건넨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학자이자 교육자이며 동시에 문화 외교관이었다. 현재 일본 오사카 지역에는 ‘왕인신사(和邇神社)’라는 사당이 남아 있으며, 그곳에서는 지금도 왕인을 기리는 제사가 이어지고 있다. 이는 그의 존재가 일본 내에서도 단순한 전래 인물을 넘어서 ‘정신적 스승’으로 기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대 한일 교류의 다층적 실체와 왕인의 매개 역할
한일 고대 교류는 단순한 물자 이동의 차원을 넘어, 문화적 심층구조까지 영향을 미쳤다. 당시 백제는 고대 삼국 중에서도 가장 해양 교류에 적극적인 나라였으며,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를 바탕으로 다양한 기술과 문화를 전파했다. 특히 일본 열도의 고분에서 출토된 백제 양식의 도자기, 토기, 심지어 건축 기법까지는 고고학적 증거로 그 연결을 입증하고 있다.
왕인은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 있었던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일본에 전한 『논어』는 단지 한 권의 철학서가 아닌, 일본 지배층의 정치적 사유 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도구였다. 이후 일본은 이를 바탕으로 국가 운영 원리를 정립했고, 유교 윤리가 관료제와 가문 중심의 사회질서를 뒷받침하게 되었다. 왕인의 전파는 결과적으로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 과정’에 있어 결정적 기점이 되었으며, 그 여파는 수백 년 간 이어졌다.
또한 왕인은 일본에서 단지 학문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백제의 교육 방식과 예법, 말투까지 함께 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대의 교육이 단순히 텍스트 중심이 아니라, ‘삶의 방식 전체’를 전수하는 총체적 교류였다는 점을 시사한다.
왕인문화제, 역사 위에 피어나는 현대 문화의 꽃
영암은 오늘날 왕인박사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매년 4월 ‘왕인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봄바람에 실려 벚꽃이 만발한 시기에 열리는 이 축제는 단지 지역 행사가 아니다.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역사와 기억을 현대적으로 되살리는 ‘문화적 시간 여행’이다. 축제의 중심 프로그램인 ‘왕인의 일본행차 퍼레이드’는 고대 사절단의 행렬을 재현함으로써, 참가자들에게 실제 역사 속 한 장면을 몸으로 느끼게 한다.
또한 문화제 기간 중에는 유교 체험, 천자문 쓰기, 전통 의례 복식 체험, 어린이 역사 교육 프로그램 등 다양한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마련되어 있다. 특히 일본의 학계, 지방 자치단체, 문화단체 등이 직접 참여해 한일 간 교류의 지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지역 축제가 가지기 힘든 ‘국제적 네트워크’이자, ‘문화 외교’의 실질적 사례로 평가받을 만하다.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함께 청년, 학생, 예술가들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가는 왕인문화제는 이제 영암을 대표하는 문화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영암군은 이 축제를 통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동시에, 교육적 의미까지 함께 품은 복합 문화플랫폼을 만들어가고 있다.
교류의 기억이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될 때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왕인박사의 삶과 그가 남긴 유산은 단순한 문화 전파를 넘어, ‘이해와 존중’을 기반으로 한 평화적 교류의 이상을 상기시킨다. 특히 최근 몇 년간 한일 관계가 냉각되었던 시점들을 떠올릴 때, 오히려 왕인과 같은 인물의 존재는 중요한 상징이 될 수 있다. 그는 전쟁이나 갈등이 아닌, 학문과 교양으로 양국을 잇는 다리를 놓았기 때문이다.
영암이 보여주는 문화적 실험은 단순한 지역 발전 전략을 넘어선다. 그것은 ‘지방에서 시작된 세계와의 대화’이며, ‘역사를 통한 미래 설계’의 방식이다. 왕인문화제가 해마다 조금씩 진화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문화를 다음 세대에게 전할 것인가?" 라고 묻는다.
결국 왕인의 이야기는 인간이 가진 ‘지식의 힘’, ‘교류의 힘’, 그리고 ‘기억의 힘’을 동시에 되새기게 한다. 영암에서 시작된 이 작은 이야기가, 일본을 거쳐 다시 세계로 뻗어 나가는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왕인의 길 위에 우리가 다시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