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풍습

4월에 설날을 지낸다, 전북 진안의 ‘지장보살제’

mystory35663 2025. 7. 5. 21:17

"설날은 당연히 음력 1월 1일 아니야?"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주천리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설날, 바로 ‘4월 설’이 존재한다. 이 특별한 날은 단순한 가족 차례가 아니라, 마을 전체가 함께 지내는 ‘지장보살제’라는 전통 제사다. 해마다 음력 4월 초파일(부처님오신날) 전후에 열리는 이 제사는 불교 신앙, 마을 제의, 조상 숭배가 한데 어우러진 진안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진안 사람들의 특별한 봄맞이 제사 풍습

 

지장보살제는 단순한 불교 행사라고 보기엔 그 스케일이 다르다. 각 가정에서는 조상께 차례를 올리고, 마을에서는 지장보살에게 공동 제사를 지낸다. 그 분위기와 의미가 설날과 흡사해서 진안 사람들은 이 날을 ‘4월 설’, ‘작은 설’이라고 부른다. 마을 어른들은 “이 날엔 조상님이 집에 오시고, 보살님은 마을을 돌보러 오신다”고 말하곤 한다.
지장보살제는 그렇게 삶과 죽음을 잇고, 사람과 신을 연결하며, 공동체가 하나 되는 시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장보살은 어떤 존재일까?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보살님

‘지장보살’이라는 이름은 어딘가 낯설면서도 신비롭다. 불교에서 지장보살은 죽은 이들의 넋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사람들은 지장보살이 지옥에 떨어진 중생조차 버리지 않고, 마지막 한 명이 구원받을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운 자비의 보살로 믿는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장례, 제사, 천도재 같은 죽음과 관련된 의식에서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진안 마령면 주천리에서는 지장보살이 단지 불교 속 인물에 머무르지 않는다. 여기선 지장보살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무연고 망자의 넋을 보듬는 인도자, 때로는 조상의 대리자로까지 여겨진다. 보살님이 마을을 돌보며 병을 막아주고, 농사를 도우며, 조상과 자손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종교를 떠난 정서적 신뢰에서 비롯된다. 진안 사람들에게 지장보살은 단지 법당에 앉은 불상이 아니라, 가족을 돌보고 마을을 지키는 ‘눈에 안 보이는 어른’처럼 존재한다. 그래서 제사도, 차례도, 기도도 모두 감사와 소통의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바로 지장보살제를 오랫동안 지켜온 이유다.

 

제사의 절차와 분위기, 설처럼 지내는 마을의 봄제사

지장보살제는 단 하루만 열리는 행사가 아니다. 진안 마령면에서는 음력 4월 초파일을 전후로 3일에서 7일가량을 행사 기간으로 삼는다. 그 기간 동안 마을 전체가 바쁘게 움직인다.
먼저 제사가 열리기 전날이나 이틀 전, 마을 주민들은 ‘정화일’이라 하여 당집 주변을 청소하고, 제단을 새롭게 정돈한다. 이때부터는 술도 끊고, 고기도 삼가며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 당집이라 불리는 ‘지장사’는 마을 어귀에 위치한 작은 사당처럼 생겼으며, 그 안에는 지장보살 탱화나 목상, 향로가 모셔져 있다.

음력 4월 초파일 아침에는 각 가정에서 먼저 차례를 지낸다. 조상에게 떡과 술, 나물과 고기를 올리고, 자손들이 절을 올린다. 이때 가족들이 모여 서로 새해 인사처럼 안부를 나누고, 식사를 함께 하니 그 분위기는 설날과 정말 닮아 있다. 그래서 진안 사람들은 이 날을 ‘4월 설’이라고 친근하게 부른다.

차례가 끝나면 오후에는 마을 제사가 시작된다. 제관으로 뽑힌 어르신들이 지장사에 모여 정식으로 보살께 제를 올린다. 제물로는 돼지머리, 시루떡, 막걸리, 나물 등 정성껏 준비한 음식들이 올라가며, 각종 의례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엄숙하게 진행된다. 제사가 끝나면 음복 시간이 찾아온다.
마을 사람들은 제물 일부를 나눠 먹으며, 올해도 무탈하고 복 많기를 기원한다. 이런 전통은 그 자체로 마을 사람들 사이의 끈을 이어주는 소중한 시간이 된다.

 

공동체의 끈을 잇는 의례, 마을 사람 모두가 주인공

진안의 지장보살제가 특별한 이유는, 종교나 신앙을 초월해 마을 사람 누구나 참여하는 ‘공동체 의례’이기 때문이다. 어느 종교를 믿든 상관없이, 이 날만큼은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지장사에 모인다. 종교보다 앞서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을의 평안’이라는 공감대다.

실제로 이 제사 덕분에 고향을 떠난 자식들도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오랜만에 만난 형제자매들이 음식을 나누고, 부모님과 조상 앞에서 절을 올리며, 자연스럽게 가족 간, 이웃 간의 정이 돈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은 “이 날 아니면 얼굴도 보기 힘든 자식들이 찾아온다”며 웃는다.
지장보살제는 단절된 가족 관계를 다시 잇고, 세대 간의 소통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날을 단지 전통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법’이라 여긴다. 지장보살은 단지 신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을 잇는 매개체가 된다. 그래서 이 날은 그냥 하루가 아니라, 온 마을이 함께 기억하는 축제이자 기도이며, 동시에 ‘약속된 시간’이다.

 

전통을 지키며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오늘날에도 진안의 지장보살제는 여전히 살아 있다. 물론 과거에 비해 규모는 작아졌고, 참여 인원도 줄었지만, 그 정신만큼은 여전히 마을의 중심이다. 진안군에서도 이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 지정과 지원을 검토하고 있으며, 몇몇 마을에서는 지장보살제를 지역 축제와 연계하여 외지인들과도 함께 나누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지장보살제의 핵심은 여전히 ‘외부의 눈을 위한 행사’가 아니라, ‘우리끼리의 약속’이라는 데 있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준비하고, 마음을 모으고, 기도하는 이 시간은 단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미래를 잇는 방법이다.

지장보살제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와 함께 살아가고 있나요?”
그리고 조용히 답한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함께 빌고, 함께 나누고, 함께 기억해야 해요.”

이렇게 진안의 지장보살제는 단순한 민속행사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고, 전통과 오늘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리는 해마다 음력 4월이 되면, 마을마다 다시 튼튼히 세워진다.

 

진안 사람들의 특별한 봄맞이 제사

진안 마령면의 지장보살제는 단순한 불교 의례가 아니라, 조상과 보살,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하나 되는 살아 있는 전통이다. 음력 4월 초파일 전후에 열리는 이 제사는 설처럼 가족이 모이고, 이웃이 함께하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지장보살은 마을을 지키는 상징이자,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존재다.
이 전통은 단지 보존해야 할 과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이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공동체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