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부안. 고창과 변산반도 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은 서해의 바닷바람이 드세게 불어오고, 바다와 육지가 맞닿은 지형적 특성 덕분에 예부터 다양한 신화와 민속 설화가 자리를 잡아왔다. 이러한 부안의 지형과 자연환경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다채로운 신앙의 형태로 발현되었고, 그중 오늘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화가 하나 있다. 바로 ‘개양할망 신화’이다.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개양할망 신화는 단지 오래된 전설이나 구비 설화로만 보기엔 아까운 요소를 품고 있다. 이 신화는 여성 신령에 대한 신앙, 바다와 자연을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의 이미지,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지역의 독특한 풍습과 금기를 함께 담고 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넘어 지역 사회의 행동 양식, 여성 공동체의 구조, 그리고 샤머니즘적 생활 문화가 집약된 복합적인 전통으로 기능해왔다.
본 글에서는 지금은 거의 잊혀진 개양할망이라는 존재가 과거에 어떤 방식으로 지역에 뿌리내렸고, 그녀를 중심으로 어떠한 풍습과 의례가 전개되었으며, 오늘날 그 신화가 어떤 문화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네 개의 단원에 걸쳐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이는 단순한 ‘지방 설화’를 되짚는 작업이 아니라, 사라진 여성 신화 속에서 지금 우리 사회가 놓치고 있는 문화적 질문들을 복원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개양할망 신화의 기원과 전승 구조
개양할망 신화는 아직 공식적인 문헌으로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지만, 전북 부안의 연안 지역, 특히 격포와 줄포를 중심으로 구전되고 있는 입말 신화의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마을 어르신들의 말에 따르면 이 신화는 수백 년 전부터 이어졌으며, 비록 이야기는 매번 다소 다르게 전달되었지만, 핵심 서사와 여신에 대한 존경심은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신화의 시작은 이렇다. 먼 옛날, 부안 앞바다는 늘 거센 풍랑과 갑작스러운 소용돌이로 어부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공포의 바다였다. 고기를 잡으러 나간 이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었고, 마을은 항상 슬픔과 불안 속에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 절벽 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노파가 나타났다. 그녀는 바닷물을 떠 마시며 기이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그날 이후로 바다는 기이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그 노파를 ‘개양할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개양’이라는 단어는 여러 해석을 낳았다. 한 설에서는 ‘바다의 입구를 여는 자’라는 의미로, 또 다른 설화에서는 ‘개(열다)’와 ‘양(밝음, 양지)’이 결합된 명칭이라 말한다. 이중적 해석은 이 신화의 모호성과 상징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개양할망은 곧 풍랑을 잠재우고, 생선을 불러들이며, 땅에는 비를 내리는 자연 통제의 주체이자, 생명의 순환을 관장하는 여성 신령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녀가 본래 인간이었는지, 신이었던 존재가 인간으로 내려온 것인지는 명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마을의 평안을 회복시킨 후 사라졌다는 점에서, 고대 샤머니즘적 신격화 과정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또한 신화 속 개양할망은 남성 중심의 전통 신화에서는 보기 드문 능동적 여성 신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는 단순히 설화적 특징에 그치지 않고, 마을 풍습과 공동체 의례,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깊이 영향을 미쳤다.
기이한 풍습, 물을 ‘던져야’ 하는 금기와 의례
개양할망 신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에 그치지 않고, 실제 생활 속에서 구체적인 풍습과 금기를 수반했다는 점이다. 부안 지역의 일부 어촌 마을에서는 최근까지도 ‘개양할망의 날’이라 불리는 특정 시기에, 물을 특정 방식으로 길어야 한다는 독특한 풍습이 존재했다.
가장 유명한 예가 바로 “물을 길을 때 바가지째 던지듯 부어야 한다”는 행위다. 일반적으로 물은 조심스레 따르듯 담는 것이 보통이지만, 개양할망을 기리는 날에는 반드시 두 손으로 바가지를 잡아 ‘툭’하고 힘껏 붓는 동작을 취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몸짓이 아니라 개양할망의 분노와 감정을 다스리는 행위로 여겨졌다.
전승에 따르면, 개양할망은 과거 분노했을 때 바닷물을 손으로 집어던져 풍랑을 일으켰다고 한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은 이를 반대로 수행함으로써 그녀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풍랑 없이 평온한 해안을 맞이하려는 의식을 지속해온 것이다. 즉, 풍습은 단지 상징이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의 무언의 대화이자 주술적 교감이었다.
또한 개양할망에게 바치는 제사 의례는 오직 여성만 참여 가능한 비밀스러운 행사였다. 제사의 날이 되면 출산을 경험한 여성들만이 흰 천을 머리에 두르고, 새벽녘 소금과 쌀, 말린 생선, 정화수 등을 준비해 해안 절벽 위의 제단에 바쳤다. 남성의 출입은 철저히 금지되었고, 제물 역시 손수 정화된 물로 씻어야 했으며, 제례 후에는 ‘말을 아껴야 한다’는 또 다른 금기가 뒤따랐다.
이와 같은 풍습은 단순한 민속적 잔재가 아니라, 여성의 신성성과 공동체 내부에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 코드였다. 특히 제례에 참여한 여성들은 마을 내에서 ‘경험자’로서 사회적 신뢰와 상징적 권위를 얻었으며, 이는 여성 중심의 문화 구조가 현실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현대에서의 의미와 문화적 재해석
21세기 현재, 개양할망 신화는 거의 잊혀진 설화로 남아 있다. 이는 문헌으로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고, 도시화와 관광개발로 인해 제단, 굿당, 공동체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의미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몇몇 지역 민속학자와 여성주의 연구자, 문화예술 단체들이 이 신화를 다시 조명하고 있으며, 그 흐름은 점점 다양화되고 있다.
개양할망은 더 이상 단지 바닷가의 신령으로 머물지 않는다. 그녀는 지금 생명과 자연의 균형을 회복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상상력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살아나고 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공동체 감각과 자연과의 관계 회복에 대한 갈망은, 개양할망 신화의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
일부 예술인들은 이 신화를 기반으로 신화 창작극, 바다 여신 축제, 여성 민속 체험 프로그램 등 문화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으며, 지역 축제에서 개양할망을 모티프로 한 퍼포먼스도 시도되고 있다. 이는 단지 전통을 소비하는 방식이 아니라, 신화의 구조를 통해 지금의 사회와 대화하는 문화적 복원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개양할망 신화는 오늘날 여성의 역할, 생명에 대한 책임, 자연 재난 앞의 인간의 나약함 등을 다시금 성찰하게 만든다. 이 신화는 수동적이고 보호받는 신이 아니라, 세상을 능동적으로 조율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강력한 여성 주체를 제시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도 기억되어야 할 여신이며,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 새롭게 읽혀야 할 현대의 신화다.
잊혀진 여신, 부안 땅의 개양할망을 다시 보다
전라북도 부안에서 구전되던 개양할망 신화는 단순한 지역적 설화를 넘어서는 복합문화유산이다. 이 신화에는 서해의 자연환경과 공동체의 생존 조건이 빚어낸 상상력, 그리고 여성을 중심으로 한 민속 구조가 녹아 있다. 바다를 잠재우고, 생명을 보듬으며, 공동체의 안녕을 지키던 개양할망은 그 자체로 한국 신화계에서 드문 여성 신의 독립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신화를 단지 ‘잊혀진 이야기’로 묻는 것이 아니라, 다시 질문하는 것이다. 과연 그녀는 어떤 존재였는가? 왜 그녀의 풍습은 여성만 참여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그녀의 흔적을 문화적으로 재해석하고 계승할 수 있는가?
개양할망은 어쩌면 여전히 부안 앞바다를 지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모습은 더 이상 제단 위가 아닌, 우리의 기억 속, 예술 속, 문화적 상상력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그녀를 다시 말하고, 다시 부르는 이 행위가 바로 신화를 살아있게 만드는 힘이며, 우리 시대의 무속 문화가 다시 시작되는 지점이 될 수 있다.
'명절 풍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청북도 단양, 전설의 여신이 깨어나는 날, ‘할미축제’ (1) | 2025.07.02 |
---|---|
설보다 소중했던 날, 부석사 삼신제를 다시 보다 (1) | 2025.07.02 |
제주도의 굿당과 도새기 굿, 신과 인간을 잇는 살아있는 제의 문화 (0) | 2025.07.01 |
생명의 염원을 품은 신성한 공간, 애기당(孩兒堂) 풍습 (1) | 2025.07.01 |
경상도 의성의 ‘우구제(雨求祭)’, 하늘에 비를 청하는 농민들의 기도 (1) | 2025.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