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청송은 낙동정맥 줄기에 둘러싸인 깊은 산골마을이다. 이곳은 천연의 자연환경과 함께 조용히 흐르는 공동체 전통이 어우러진 곳이다. 청송의 겨울은 유난히 깊고 고요하지만, 정월 대보름 전날 밤이 되면 이 고요한 산골 마을이 들썩인다. 북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도깨비들 때문이다. 아이들은 갑자기 마당에 나타난 도깨비를 보고 소리치고, 웃고, 때로는 울기도 한다. 그렇게 청송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설날, ‘도깨비 설날’이 열린다.
도깨비 설날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이것은 청송 마을 공동체가 어린이를 위한 설날을 따로 만들어주는 전통적 축복의 날이다. 어른들은 도깨비로 분장해 마을 곳곳을 누비며 아이들을 놀라게 하고, 또 간식을 나눠준다. 도깨비는 무섭고 신비로운 존재지만, 동시에 익살맞고 정겨운 캐릭터다. 아이들은 도깨비에게 쫓기면서도 기대감에 들뜨고, 결국 마주한 도깨비에게 자신의 용기를 시험받는다.
이 전통 속에는 단지 민속놀이 이상의 가치가 담겨 있다. 도깨비 설날은 마을 전체가 한 아이를 위해 움직이는 날이며, 아이에게 마을 전체가 ‘너는 소중한 존재야’라고 말해주는 상징적인 의식이다. 어른들은 도깨비를 통해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마주하는 용기, 상상력, 인간관계 속의 감정 표현을 자연스럽게 가르친다. 이 글에서는 도깨비 설날의 유래와 역사, 행사 절차, 문화적 의미, 그리고 오늘날의 계승과 현대화된 모습까지 네 개의 단락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설날은 어른들의 것’이라는 생각을 깬 이 풍습은, 어쩌면 가장 따뜻하고 인간적인 설날일지도 모른다.
도깨비 설날의 유래 – 도깨비는 왜 아이들에게 왔을까
청송의 도깨비 설날은 정월 대보름 전야에 열리는 독특한 민속행사로, 지역의 오랜 신앙과 공동체 문화가 결합된 어린이 중심 세시풍속이다. 이 풍습의 기원은 정확한 문헌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청송 현동면과 파천면 일대의 주민들 사이에서는 “증조할아버지 때에도 도깨비가 왔다”는 전언이 전해질 정도로 오래된 전통이다.
이 풍습은 ‘도깨비가 정월 대보름 전날 밤에 마을로 내려와 아이들을 점검한다’는 신화적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 도깨비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다. 청송 사람들에게 도깨비는 아이를 시험하고, 겁 많은 아이에게 용기를 주며, 착한 아이에게는 간식을 나눠주는 존재다. 일종의 인간적인 신령이자, 아이들의 수호자 같은 상징이다.
청송의 도깨비는 종종 마을 수호신과 연결되기도 한다. 정월 대보름은 원래 한 해의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는 민속 명절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제사를 올리거나 풍농제를 지내는 동안,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날은 없었다. 그래서 마을 어른들은 아이들을 위해 ‘작은 설날’을 따로 만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바로 도깨비 설날이다.
과거에는 도깨비가 진짜 존재한다고 믿는 아이들도 많았다. 아이들은 도깨비에게 쫓기고, 때로는 울기도 했지만, 다음 날 마을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고 작은 선물을 받으면서 ‘나는 도깨비를 이겨냈다’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이 경험은 단순한 놀이가 아닌 용기를 훈련하고, 감정을 조절하며,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는 체험학습의 장이었다.
이러한 전통은 마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첫 시험’과도 같았다. 어른들은 도깨비라는 상징적 매개체를 통해 아이가 감정을 마주하고, 두려움을 넘어서도록 도왔으며,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줬다.
행사 구성과 절차 – 도깨비와 노는 하룻밤, 마을 전체가 교실이 되다
청송의 도깨비 설날은 단순한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치밀하게 준비되는 전통 행사다. 과거에는 마을의 어르신들이 자체적으로 준비하고 실행했지만, 지금은 일부 지역에서는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청송문화원, 학교, 지역 공동체가 협력해 함께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 사전 준비 – 도깨비는 그냥 오지 않는다
도깨비 설날이 열리기 일주일 전부터 마을 청년회, 노인회, 학부모회 등에서 회의를 열고 도깨비 역할을 정한다. 도깨비는 2~3명씩 조를 이뤄 마을을 순회할 수 있도록 구성되며, 각 도깨비에게는 성격과 이름이 주어진다. 예를 들어 ‘잔소리 도깨비’, ‘웃기는 도깨비’, ‘간식 도깨비’, ‘용기 도깨비’ 등이다.
분장은 전통적인 짚옷, 탈, 헝겊 옷 등을 이용하여 만들어지며,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철저히 준비된다. 마을 아이들도 ‘올해는 어떤 도깨비가 올까’ 하며 설렘과 긴장 속에 기다린다.
◾️ 도깨비 출몰 – 공포와 기쁨이 공존하는 한밤
행사의 핵심은 도깨비가 마을에 출몰하는 밤이다. 저녁 8시쯤부터 도깨비들은 북을 치며 등장해 마을 골목을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창문 틈으로 도깨비를 엿보거나, 마당에 나가서 직접 마주한다. 도깨비는 큰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고, 아이는 도망치거나 마주선다.
도깨비는 용감하게 대답하거나 겁먹지 않는 아이에게는 “용감했구나, 복 많이 받아라”며 덕담과 함께 간식을 건넨다. 반면 무서워 우는 아이에게는 잠시 장난을 치다가도, “괜찮다”며 쓰다듬고 선물을 준다. 이 행위는 어른이 아이를 존중하고, 정서적 안전을 확인시켜주는 순간이다.
◾️ 다음날 아침 – 도깨비와의 화해와 공동 놀이
정월 대보름 아침에는 도깨비들이 다시 나타나 아이들과 함께 전통놀이를 즐긴다. 윷놀이, 제기차기, 굴렁쇠 굴리기, 팽이치기 등을 하며, 도깨비는 아이들과 팀을 나눠 놀기도 한다. 행사 마지막에는 도깨비가 아이 한 명 한 명을 안아주며 “한 해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라”는 덕담을 건넨다.
이 시간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아이들은 공포와 용기, 기대와 놀람, 나눔과 웃음이라는 감정의 파도를 넘고 나서 공동체의 축복 속에서 다시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의식을 경험하게 된다.
오늘날의 의미 – 전통이 아이들의 마음에 뿌리내리다
현대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지역 공동체는 해체되고, 아이들은 스마트폰과 AI에 둘러싸인 디지털 세계에서 성장한다. 이런 시대에 도깨비 설날 같은 전통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지금이야말로, 청송의 도깨비 설날이 필요한 시대다.
청송군은 도깨비 설날을 ‘아동 정서교육형 전통문화 프로그램’으로 인정하고, 지역 초등학교와 연계한 문화체험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청송문화원은 매년 1월 말, ‘도깨비 설날 문화학교’를 개설해 아이들이 도깨비 가면을 만들고, 전래동화 속 도깨비 이야기를 듣고, 실제 도깨비 분장을 해보는 체험 활동을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공포를 감정적으로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낯선 존재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 수 있는지’를 배운다.
이러한 활동은 단순히 전통을 계승하는 것을 넘어서, 현대적인 감성에 맞는 감정 교육과 공동체 의식을 자연스럽게 전수하는 수단이 된다. 또한, 도깨비 설날은 관광 콘텐츠로도 활용되고 있다. 일부 마을은 외부 방문객을 위한 ‘도깨비 설 체험 민박’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가족 단위의 여행객에게도 아이 중심 문화를 소개하는 창구로 활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도깨비 설날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아이 하나를 위해 마을이 움직인다’는 메시지는, 공동체가 얼마나 따뜻한 교육자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을은 아이에게 도깨비를 보내며 두려움을 선물하지만, 동시에 그 두려움을 함께 극복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이 전통은 결코 사라져선 안 될 정서 공동체의 자산이다.
어른의 축복으로 완성되는 아이의 설날
청송의 도깨비 설날은 하나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어른이 아이에게 건네는 응원이며, 공동체가 한 사람의 성장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축제다. 도깨비가 울리는 북소리는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는 메시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청송의 어느 마을에서 아이는 도깨비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무섭지만 기다려지는 존재, 장난꾸러기지만 위로가 되는 존재. 도깨비는 아이의 상상력과 용기를 키우는 최고의 교사였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전통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전통이 지니는 ‘마음의 언어’를 다음 세대에게도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깨비 설날은 아이의 설날에서 모두의 설날로, 마을의 이야기에서 사회의 이야기로 자라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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