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풍습

함경도 실향민의 그리운 고향을 향한 제사, ‘함경도 신년제’ 풍습

mystory35663 2025. 7. 3. 05:44

한국전쟁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집을 남겨두고 고향을 등졌다. 그리고 남으로 내려와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함경도 출신의 실향민들은 북녘의 바람과 산, 바다를 가슴에 묻고, 그 기억을 간직한 채 남한 각지에 흩어져 정착했다. 이들에게 설날은 단순한 명절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마음속으로 부르는 날이자, 하늘과 조상, 고향의 산천에 간절한 마음을 전하는 영적 제사의 날이었다.

 

국경 너머 그리운 고향을 향한 제사, 실향의 민속을 잇다

 

실향민들은 설날마다 그리운 고향을 떠올리며 ‘신년제’라는 특별한 제사를 지냈다. 이 신년제는 고향을 향한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낸 영적 실천이었으며, 남쪽의 전통 설 제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제사는 단순히 조상에 대한 공경을 넘어, 자신이 속했던 북방 문화에 대한 기억과 존엄을 이어가기 위한 삶의 방식이었다.

이 글에서는 실향민들이 어떻게 이 신년제를 통해 실향의 아픔을 제의로 승화했는지, 그리고 신년제의 구성과 절차, 그 의미, 오늘날 이 제의가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를 총 네 단락에 걸쳐 깊이 있게 다룬다. 이는 단순한 민속 전통이 아니라, 분단이라는 비극을 살아낸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성한 문화의 흔적이다.

 

함경도 신년제의 유래 – 북방 민속의 맥을 잇는 제의

함경도 신년제는 단순히 설날에 차례를 지내는 풍습이 아니다. 이 제의는 함경도의 토착 샤머니즘과 선조 제례가 결합된 북방 특유의 신년 의식으로, 그 기원은 매우 깊고도 복합적이다. 본래 함경도 지역에서는 새해 첫날이 되면 삼신할머니, 산신령, 성주신 등 마을과 가족의 안녕을 관장하는 신들에게 제를 올리는 관습이 존재했다. 남한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간결한 조상 차례와 달리, 함경도에서는 자연신과 조상을 동시에 모시는 제례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기원은 한민족의 북방계 샤머니즘 전통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특히 산악지대에 거주하며 자연의 기운을 신성하게 여겼던 북방 민족들의 정신문화는 ‘하늘에 절을 올린다’는 제사의 형태로 계승되었다. 하늘과 북녘 땅에 대한 경외심이 강했던 실향민들은,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 정착한 뒤에도 자신들의 종교적·문화적 뿌리를 잊지 않았다.

1950년대 이후 강원도 강릉, 속초, 고성, 인제, 철원, 경기도 의정부, 포천 등지에 형성된 실향민 공동체는 매년 음력 설날이 되면 북쪽을 향한 야외 제사를 올렸다. 이 제사는 조용한 언덕이나 바다가 보이는 언덕, 또는 고향이 바라보이는 마을 가장 높은 곳에서 열렸다. 이들은 제사에 참여하며, 이 제의가 단지 조상에 대한 경의를 넘어서, ‘고향에 대한 영혼의 편지’이며, ‘돌아가겠다는 다짐의 행위’라고 여겼다. 실향민들에게 신년제는 하나의 영적 선언이자 문화적 저항이었다.

 

신년제의 절차와 구성 – 바람과 북녘을 향한 절

함경도 신년제의 가장 큰 특징은 하늘과 북쪽을 향해 열린 야외 제사라는 점이다. 남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내부의 차례상과 달리, 신년제는 가능한 한 하늘과 가까운 곳, 그리고 고향이 있는 북녘 하늘이 잘 보이는 장소에서 진행된다. 장소는 마당 한복판, 마을 공터, 야산의 너럭바위, 혹은 바닷가 언덕 등으로 다양하지만, 공통적으로 자연과 열린 하늘이 마주하는 곳이 선택된다.

의식은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녘에 시작된다. 참여자들은 정갈한 옷을 입고 제단을 꾸미는데, 제단은 반드시 북쪽을 정면으로 하여 설치되며, 제물 또한 고향 함경도 스타일로 차려진다. 밥, 나물, 말린 생선, 청어구이, 무절임, 막걸리, 감자떡, 메밀전병 등 소박하면서도 북녘의 음식을 재현한 메뉴들로 구성된다. 이 음식들은 고향의 기억을 불러오는 정서적 매개체이자, 실향민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상징물이다.

의식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 초헌례 – 가족의 장손 혹은 공동체의 연장자가 먼저 북쪽 하늘을 향해 절을 올리고, 술을 한 잔 올린다. 축문은 대부분 생략되고, 조용한 읊조림이나 마음속 염원으로 대체된다.
  • 아헌례 – 가족 혹은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절을 올린다. 모두 무릎을 꿇고 두 번 큰 절을 올리며, 조용히 고향의 지명을 부르는 이도 있다.
  • 삼헌례 및 분향례 – 향을 올리고, 함경도의 산신, 성주, 조상신에게 가정의 평안과 건강, 그리고 돌아갈 길이 열리기를 기원한다.
  • 북녘 절 – 제의의 절정이다. 모두 함께 고개를 숙이고 북쪽 하늘을 향해 묵묵히 절을 올린다. 이때는 누구도 말을 하지 않으며, 눈을 감고 손을 모은 채 기도한다. 일부는 눈시울을 붉히고, 흐느끼며 절을 마치기도 한다.

이 제사는 단지 의례 절차가 아니라, 북에 두고 온 가족과 뿌리를 향한 ‘정신적 포옹’이다. 제의가 끝나면 제물을 나누며, 어른들은 조심스레 고향 이야기를 꺼낸다. 아이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뿌리를 상상하고, 공동체는 그 순간만큼은 하나의 고향을 함께 품은 듯한 울림을 느낀다.

 

오늘의 신년제 – 망각과 복원의 경계에서

오늘날 함경도 신년제는 점점 그 모습을 감추고 있다. 1세대 실향민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그들의 기억과 함께 제사라는 문화적 행위도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강원도 속초, 고성, 동해 등지의 실향민 마을에서는 지금도 조용히 이 전통을 잇고 있다. 마을 공동체가 음력 설날 아침마다 모여 ‘북녘을 향한 절’을 이어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편의 구전사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이 전통을 복원하려는 민속문화적 시도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속초 실향민문화축제나 강릉 지역의 북방문화 기념행사에서는 신년제를 현대적 방식으로 재현하거나, 2세, 3세 실향민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으로 구성해 정체성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도 ‘내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질문이 늘어나면서, 신년제는 단지 과거를 추억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공동체적 연대를 회복하는 문화적 행위로 다시 해석되고 있다. 실향민이 아닌 지역 주민과 문화연구자들까지도 이 풍습에 관심을 보이며, 남북 분단이 남긴 민속유산으로서의 신년제를 주목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신년제는 단지 실향민의 개인적 슬픔을 담은 의례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분단을 몸소 살아낸 이들이, 말보다 절을 통해 보여준 저항이자 평화의 메시지이다. 고향은 잃었지만, 기억은 잊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국경 너머 그리운 고향을 향한 제사, 실향의 민속을 잇다

함경도 신년제는 단지 고향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제사가 아니다. 그것은 조국의 분단이라는 거대한 역사 앞에서, 한 개인과 가족, 공동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숭고하고 진심 어린 저항의 방식이었다. 말없이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절을 올리던 그들의 몸짓에는,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과 그래도 언젠가 만나리라는 믿음이 함께 담겨 있었다.

비록 지금은 점차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풍습일지라도, 이 제사가 남긴 정신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다. 그 정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향은 단지 땅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기억하고 지켜나가는 마음의 터전이다. 그것이 곧 삶의 뿌리이며, 문화를 지키는 힘이다."

이제 신년제는 실향민의 제사를 넘어, 남북이 단절된 채 살아가는 이 땅에서 평화와 기억을 잇는 민속적 언어로 자리 잡아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고향이라는 단어가 다시 물리적인 장소가 되기를—그 절실한 염원이, 조용한 북녘을 향한 실향민들의 절 속에 지금도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