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에 ‘공동체 전통’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대단지 아파트, 상업시설, 대중교통망으로 촘촘하게 구성된 도봉구 역시 외형만 보면 현대적 도시공간 그 자체다. 그러나 이 지역의 산자락과 마을 경계에는 여전히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조용히 이어져온 ‘산제’ 문화는 도봉구 주민 공동체의 저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전통이다.
도봉구는 도봉산과 북한산을 품은 서울 북부의 산지 지역으로, 예부터 마을마다 나름의 자연 숭배 문화가 뿌리내려 있었다. 그 중심에는 ‘산제’라는 공동체 제의가 있다. 산제는 특정 종교 의식이 아닌, 마을 전체가 주체가 되어 자연신에게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건강을 기원하는 민속의례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의례가 오늘날에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는 단지 전통을 보존하는 수준을 넘어서, 마을 자치의 정신과 주민 연대의 실천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산제는 누구의 제사인가 : 특정 가문이 아닌 ‘모두의 제례’
도봉구에서 이어진 산제는 조상 제사와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조상 제사는 혈연 집단이 중심이 되지만, 산제는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공공 제례다. 지역의 원로, 이장, 제관(제사를 집행하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전체 주민이 고루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제례는 단순한 형식의 재연이 아니라,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세대 간 전통을 전수하는 사회적 장치로서 작동해 왔다.
도봉구의 오래된 마을, 예를 들어 방학동이나 쌍문동, 도봉동의 산자락 마을에서는 1960~70년대까지도 매년 정해진 날에 산제를 지내는 풍습이 남아 있었다.
당시에는 마을 어귀의 큰 나무나 자연석 앞에 간단한 제단을 마련하고, 떡과 과일, 정갈한 음식으로 산신에게 예를 올렸다. 이 모든 과정은 주민이 함께 음식을 마련하고 절차를 나누며 준비했다. 산제는 단지 신에게 바치는 의례가 아닌, 공동체가 한 자리에 모여 마음을 모으는 시간이었다.
오늘날 이러한 산제는 일부 마을에서는 축소되었지만, 지역 문화단체와 주민협의회, 동 자치센터를 중심으로 복원 또는 재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점차 늘고 있다. 특히 주민 참여형 행사로 탈바꿈된 산제는 공동체 구성원 간 소통을 복원하는 매개로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잊혀진 전통이 아니라, 살아있는 마을 자치의 상징
산제를 단지 전통문화로만 보는 시선은 산제의 현재적 가치를 놓칠 수 있다. 도봉구에서 산제는 지역 자치와 공동체 회복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준비하고 실행하는 산제는, 사실상 작은 마을 단위의 ‘자치활동’과 같은 구조를 띤다. 이 과정에서 구성원들은 역할을 분담하고, 토의를 통해 진행 방식을 정하며, 세대 간 전통을 공유하는 기회를 갖는다.
예를 들어, 최근 방학동 주민자치위원회와 지역 청년단체는 산제 복원 프로젝트를 통해 사라졌던 마을 제단을 찾아내고, 구술 기록을 바탕으로 옛 산제 절차를 복원하고 있다.
또한 지역 초등학교와 연계하여 아이들이 산제 행사에 참여하거나, 전통 음식 만들기 활동을 체험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화하고 있다. 이는 전통이 현대 속에서 실천될 수 있는 ‘공동체 교육’의 일환이기도 하다.
주민의 자발성과 협력이 중심이 되는 이러한 활동은 행정 주도의 일방향적 문화행사와는 질적으로 다른 흐름을 만들어낸다. 실제로 도봉구의 산제 복원 활동은 주민 참여율과 만족도가 높아, 타 지자체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했다.
산제의 현대적 가치 : 연대, 치유, 지속 가능성
도봉구 산제가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치유와 회복’이라는 현대적 가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 도시는 익명성과 단절, 고립의 문제를 안고 있다.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는 생활 속에서, 과거 마을 단위의 유대감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산제를 통해 이웃이 함께 모이고, 공동의 목적을 위해 협력하는 경험은 지역 공동체의 회복력을 키우는 중요한 기제로 작동한다.
산제를 중심으로 열리는 축제나 마을 행사는 단지 전통을 지키는 활동이 아니라, 주민 스스로의 정신적 위로와 소속감을 강화하는 도구가 된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지역 공동체 회복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이러한 참여형 문화가치가 다시 평가받고 있다.
지속 가능성 측면에서도 산제는 의미가 깊다. 대규모 자금이나 외부 자원이 아닌, 주민 스스로의 참여와 기획으로 운영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소규모 마을 단위에서도 꾸준히 실현 가능하다. 환경적으로도 산제는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산과 나무, 물을 대상으로 한 공경과 절제의 정신을 담고 있어, 생태친화적 문화 실천의 일환으로도 읽을 수 있다.
서울 도심 속 작지만 단단한 공동체 문화의 재발견
서울이라는 글로벌 도시 안에서 전통 문화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그러나 도봉구 산제는 단순히 전통의 ‘형식’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마을 자치와 주민 연대의 정신이 현대적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이러한 문화는 외형적으로는 소박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공동체 정체성, 자율성, 지속 가능성이라는 도시문화의 핵심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도봉구의 산제 문화는 행정이 주도하는 일회성 행사가 아닌, 지역 주민 스스로가 만들고 유지해가는 살아있는 문화 자산이다. 이 문화가 앞으로도 이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한 ‘전통 행사’로 치부되기보다는, 공동체 회복을 위한 실천적 활동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전통이 현대 사회와 충돌하지 않고, 함께 공존하며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도봉구 산제는 더 이상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손으로 정성껏 준비되고,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함께 기억되는 ‘살아있는 문화’다. 그리고 그 문화는 오늘의 도시, 내일의 서울을 조금 더 사람답게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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