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 민속신앙에서는 바다를 비롯한 물과 관련된 신들을 여성의 형상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신화적 상상력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이 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살아온 사회적 배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자, 수확과 풍요를 결정하는 공간이며, 동시에 위험과 재난이 잠재된 세계입니다. 이런 이중적 속성은 여성의 이미지와도 닮아 있습니다.
특히 어촌과 해안 마을에서는 ‘바다할미’, ‘용할미’, ‘해신할망’ 등으로 불리는 여성 신들이 전통적으로 숭배되어 왔습니다. 이 신들은 대체로 자식과 마을을 지켜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로 인식되며, 실제로는 남성 신보다 친근하고 일상적인 힘을 가진 보호자로 여겨졌습니다. 여성들이 바다신과 직접적으로 교감하는 제사, 무속 굿을 주도한 사례도 많았으며, 이는 한국 민속 신앙에서 여성이 주체가 되어 바다의 신과 소통했던 역사를 반영합니다.
제주도의 해녀와 해신 신앙 – 수망당과 바다할망 이야기
여성 중심의 수신 신앙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지역은 제주도입니다.
제주는 유교적 남성 중심 제례가 약한 지역으로, 여성 중심의 무속과 제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독특한 민속 지형을 보여줍니다. 특히 해녀들의 존재는 제주 여성과 바다, 그리고 신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제주의 해녀들은 생계를 위해 매일같이 바다에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바다는 고된 노동의 현장이자, 생사의 경계가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녀들은 바다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수망당(守望堂)’에서 해신에게 무사 귀환과 풍어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는 풍습을 지켜왔습니다. 수망당은 바다의 신을 모시는 신당으로, 보통 마을의 해안 가까운 언덕에 세워져 있으며, 주로 여성 무속인이 관리하고 의례를 주관합니다.
제주도 무속에서는 ‘해신할망’, ‘칠성할머니’, ‘바당할머니’ 같은 여성 신들이 등장하며, 이들은 모두 바다를 다스리고 해녀들을 돌보는 존재입니다. 해녀 사회에서는 실제로 할망굿(해신굿)을 통해 바다의 신에게 직접적인 의례를 드리며, 신에게 바치는 음식, 제물, 기원 내용도 모두 여성적 서사와 생명 기원적 상징으로 구성됩니다. 이러한 점은 수신제의 역사에서 여성이 단순한 참가자가 아니라 제의의 실질적인 중심에 서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동해안 갯마을의 바다할미 신앙 – 여성 무속과 공동체 제사
동해안 일대에서도 바다를 여성신으로 인식하고 숭배하는 전통은 뚜렷하게 확인됩니다. 강원도 고성, 삼척, 울진, 포항 등의 해안 마을에서는 예부터 ‘용왕할머니’, ‘갯할미’, ‘물할미’ 등으로 불리는 여성신을 모시는 제사가 전해져 왔습니다. 이 신들은 자연재해로부터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자, 물고기 떼를 몰아주는 풍요의 여신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용왕제 또는 해신제는 대부분 무당이 중심이 되어 진행하는 무속제의 형식을 따릅니다. 여성 무속인은 제사의 주재자이며, 동시에 신과 마을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개자입니다. 제사의 장소는 바닷가 절벽이나 갯바위에 마련된 작은 신당이며, ‘할미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당은 바다를 향해 굿을 벌이며, 그 안에는 해신에게 사죄하고, 풍어를 기원하며, 생명과 평안을 기원하는 여성적 기원 문구가 반복됩니다.
무속 의례에서는 제물로 삶은 문어, 생선, 쌀밥, 떡, 미역국 등이 사용되며, 이는 모두 여성의 삶과 음식 문화, 가사 노동과도 연결된 요소입니다. 이러한 제사는 단순한 종교행위가 아니라, 마을 여성들이 주도하고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적인 신앙 실천으로 기능하였습니다. 여성은 제사의 보조자가 아니라, 바다의 신과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주체적으로 제의 공간을 구성하는 존재였습니다.
구분 | 제주도 수신제 (수망당 중심) | 동해안 수신제 (갯마을 여성신앙) |
지역 대표 사례 | 제주시, 성산읍, 구좌읍 등 해녀 마을 | 강원 고성, 삼척 / 경북 울진, 포항 등 동해안 어촌 |
신앙 대상 | 해신할망, 바당할머니, 칠성할머니 등 여성 바다신 | 용왕할미, 갯할미, 물할미 등 여성 수호신 |
제사 장소 | 수망당(守望堂): 해안 언덕 위 신당 | 할미당, 바위 제단: 바닷가 절벽이나 포구 근처 |
제의 주체 | 해녀들, 여성 주민, 여성 무속인 | 여성 무속인(무당), 마을 공동체 여성들 |
주요 제의 방식 | 기도, 제물 바치기, 할망굿(해신굿) | 무당의 굿 + 제물 봉헌 + 집단 참여 제의 |
제물 구성 | 전복, 미역, 떡, 생선, 쌀밥 등 해녀 삶과 연결된 식재료 | 삶은 문어, 생선, 떡, 미역국 등 바다 중심 가사 음식 |
의례의 기능과 상징 | 무사 귀환, 풍어, 생명 보호, 여성의 노동과 생애 서사 반영 | 풍어 기원, 바다 재난 예방, 공동체 결속, 여성의 주체적 신앙 실천 |
여성의 위치 | 제사의 중심, 신과 직접 소통하는 신앙 주체 | 무속의 주체, 제의의 기획자이자 집행자 |
문화적 의미 | 생계와 신앙이 결합된 여성 해양문화의 상징 | 무속과 공동체 제의가 결합된 여성 중심 민속문화의 대표 사례 |
왜 수신은 여성의 형상을 하고 있는가?
수신이 여성으로 형상화되는 현상은 단지 전통문화의 우연한 산물이 아닙니다.
이는 고대부터 전해 내려온 물과 여성의 상징적 연결성, 그리고 현실 속에서 여성들이 수행한 역할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물은 고대부터 정화, 출산, 재생,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여성의 생리적 능력과도 연결되어 신화 속에서 물의 정령이 여성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경향을 만들어 냈습니다.
또한, 어촌 사회에서 여성은 단순한 가사 노동자가 아니라, 직접 바다에 나가 생계를 꾸리는 경제 주체였습니다. 해녀, 어부의 아내, 생선 장수 등 바다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직업에서 여성은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고, 이는 자연스럽게 여성 중심의 바다 신앙 형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민속학자들은 이러한 구조를 ‘성 역할 기반 신앙 체계’라고 분석합니다. 남성이 산의 신, 하늘의 신 등 위계적이고 권력적인 신격과 연결되는 반면, 여성은 바다, 땅, 가정처럼 생명을 품고 순환하는 공간과 신격화되는 패턴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상징 구조는 단순히 신화 속 설정이 아니라, 현실에서 여성이 가진 생태적, 공동체적 역할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 남은 바다할미 신앙의 의미
현대 사회에서는 전통적 무속과 민간신앙의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지만, 여성 중심의 수신제, 바다할미 신앙은 문화유산, 생태사유, 여성사 복원이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의미로 조명되고 있습니다.
제주도의 수망당, 삼척의 할미당, 남해의 해신제 장소 등은 현재 지역문화재나 민속문화공간으로 보존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관광자원으로 재구성되기도 합니다.
더불어 바다할미 신앙은 여성의 역사, 노동, 생명력, 공동체의식이 집약된 민속문화 자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닙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전통문화는 대체로 남성 중심, 유교적 제례 중심으로 기록되고 보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바다할미 신앙과 여성 중심의 수신제는 그러한 중심 서사에서 배제되었던 여성들의 신앙, 노동, 삶의 방식을 복원하고 재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됩니다.
또한 이 전통은 생태적 감수성과 깊은 연관을 지닙니다. 바다를 ‘정복의 대상’이 아닌 ‘공존의 존재’로 바라보며, 두려움과 경외, 감사를 표현하는 방식으로서 제사가 이어져 왔다는 점은 오늘날 기후위기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바다할미는 단지 과거의 신이 아니라, 지금도 자연과 인간, 여성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상징적 존재로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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