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 민속신앙은 자연과 생명, 인간 사이의 조화를 중시하며, 삶의 결정적 순간마다 의례를 통해 의미를 부여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출산 이후 태와 탯줄을 둘러싼 풍습은 단순한 관습을 넘어, 생명을 신성하게 바라보는 민속적 시선이 반영된 상징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강원도 영월에서는 아이의 태를 매장한 장소에 다시 찾아가 제를 지내는 ‘배꼽제’라는 고유한 전통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배꼽제는 출산 직후 이루어지는 의례가 아니라, 아이가 일정한 나이를 넘기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며, 일정한 시점에 가족이 태 매장지에서 감사를 표하거나 축복을 비는 민속 의식입니다. 이 의례는 태라는 생명체의 일부를 신성하게 다루고, 그것이 매장된 장소를 생명의 출발점이자 기도의 공간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민속신앙의 깊은 철학을 보여줍니다. 본 글에서는 배꼽제의 기원과 실천 방식, 여성의 역할, 상징성, 그리고 오늘날의 문화적 재해석 가능성에 대해 체계적으로 고찰합니다.
태의 매장과 ‘배꼽’에 담긴 생명 숭배 사상
강원도 영월을 비롯한 산간 지역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탯줄과 태를 흙 속에 묻는 풍습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이는 단지 위생적 처치가 아니라, 생명의 일부를 대지에 환원하고 자연의 품에 되돌려 놓음으로써 보호받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전국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지만, 영월 지역은 이 매장 행위에 후속 의례인 ‘배꼽제’까지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이 풍습에서 ‘배꼽’은 단순한 신체적 흔적이 아니라, 생명의 뿌리를 상징하는 핵심 코드입니다. 탯줄을 자른 그 자리는 곧 인간이 세상과 연결된 최초의 지점이며, 태를 묻은 땅은 아이의 운명과 길흉을 좌우할 수 있는 신성한 장소로 인식되었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아이가 병치레를 하거나 성장 과정에서 위기가 올 때마다 그 자리를 다시 찾고, ‘배꼽제’를 지내며 조용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여성의 출산 이후 역할과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전통 사회에서 어머니는 단지 아이를 낳는 것을 넘어, 아이의 영혼과 운명을 지켜주는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배꼽제는 바로 그 어머니가 자식의 생명과 무사한 성장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를 이어가는 민속신앙의 실천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배꼽제의 의례 구성과 실행 방식
배꼽제는 일정한 형식이나 날짜가 정해진 제사는 아닙니다. 대체로 아이가 돌을 넘기거나 유년기를 지나가는 중요한 시점에 맞춰 가족이 태를 묻었던 자리를 찾아갑니다. 이때 준비되는 제물은 그리 화려하지 않지만, 백설기, 과일, 떡, 정화수, 나물, 사이다, 막걸리 등 생명을 상징하는 음식들로 구성됩니다.
배꼽제를 지내는 순서는 간단하지만 정성스럽습니다. 먼저 태가 묻힌 자리를 다시 정비하고, 음식과 함께 아이의 최근 사진이나 편지, 소망이 적힌 손수건 등을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위에서 아이의 건강, 장수, 무탈함을 기원하는 기도가 이어지고, 부모가 함께 절을 하며 조용히 마음을 전합니다.
이때 의례를 주도하는 인물은 대개 어머니 혹은 할머니입니다. 남성 가족 구성원이 동참하기도 하지만, 주로 여성들 사이에서 구체적인 절차와 장소, 제물 준비가 논의되고 실행됩니다. 이는 배꼽제가 여성의 기억과 실천을 통해 전승된 민속 의례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배꼽제에서는 대부분 제사가 끝난 후 뒷정리를 하며 음식을 나누거나, 조용히 산길을 따라 내려오며 ‘이제는 잘 클 것 같다’, ‘할매가 봐줄 거다’ 등의 말을 나눕니다. 이는 단지 제례의 마무리가 아니라, 생명의 순환과 자연에 대한 감사를 담은 공동체적 대화라 볼 수 있습니다.
여성의 신앙 실천과 정서적 의미
배꼽제는 전형적인 여성 중심 신앙 실천의 형태입니다. 가부장 중심의 종교 제례 구조와는 달리, 이 의례는 여성의 경험과 정서, 그리고 모성 중심의 생명 인식이 제의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이의 탄생 이후에도 계속되는 어머니의 기도는, 단지 가정 내 역할을 넘어서 신과 자연 사이를 매개하는 상징적 존재로서의 여성을 드러냅니다.
또한 배꼽제는 여성들이 고통을 상징으로 전환하는 문화적 장치이기도 합니다. 출산의 고통, 육아의 불안, 아이의 병치레에서 오는 불확실성은 단지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배꼽제라는 공동체적이고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 치유와 위안의 언어로 전환됩니다. 여성은 이 의례를 통해, 말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감정을 다듬고, 자연과 대화를 시도하며, 아이의 생명력에 대한 믿음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이러한 전통은 여성 간의 구술을 통해 전해졌으며, 어머니가 딸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배꼽제의 의의와 방법을 설명하고 함께 실행하면서 민속 신앙의 세대 간 전승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배꼽제는 단지 한 세대의 의례가 아니라, 모계적 기억과 정서가 결합된 전통적 신앙 실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배꼽제의 현대적 가치와 민속문화로서의 재조명
오늘날 강원도 영월을 포함한 농촌 지역에서도 배꼽제를 실제로 지내는 가정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출산 방식의 변화, 탯줄 보관 문화의 희석, 도시화에 따른 땅에 대한 인식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꼽제는 여전히 생명에 대한 감각, 어머니의 기도, 자연과 인간의 연결을 회복하려는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현대 사회에서도 그 정신은 유효합니다.
특히 이 전통은 최근 치유와 생태, 여성 정체성 회복이라는 키워드와 접점을 이루며, 다양한 문화콘텐츠로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 단위의 생명 탄생 기념 의식, 지역기반 출산 축제, 모성 회복 프로그램 등에 배꼽제의 철학이 접목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배꼽제터를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거나 기념 공간으로 활용함으로써,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과 기억을 되살릴 수도 있습니다.
배꼽제는 단순한 풍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신성하게 여기고, 여성의 기도와 정성이 한 생애를 지탱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깃든 문화입니다. 이 고요하고도 깊은 전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시금 생명과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 소중한 유산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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